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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h! 크리에이터] #94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세하나 vol.하나 난 디자인 아웃사이더 확인
    카테고리 없음 2020. 2. 19. 11:56

    'Oh! 크리에이터'는 네이버 디자인이 동시대를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 세일의 첫번째 의자 새, 윤상에서 엄정화까지 90년대 음반 디자인 판을 좌지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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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하나다양한이력의전방위디자인디렉터. 뉴욕 비주얼 아츠스쿨(School of Visual Arts, NY)에서 광고&그래픽 디자인 전공. 대학 시절 Sony Records에서 인턴을 겪고 1997년부터 KDL, HAP Documenta, Rawmantic, 디자인 블루에서 광고, 웹, 음반, 그래픽 디자이너 그대로 활동, 잡지사 디자인 하우스의 CDO(Chief Design Officer)를 하며 이후 프리 디자인 컨설턴트로 CJ통합 멤버쉽 원(ONE)의 네이밍, BI, 광고 비주얼을 총괄하는 프로젝트의 진행, 코오롱 FNC의 '정자 댄 슈에토우','럭키 슈에토우'올빼미 캐릭터를 탄생시키고 동시에 DFSB와 인 케이 코리아 디자인&선전의 디렉터로 활동했다. 기타 디자인 하우스라 SM엔터테인먼트의 조인트 벤처인'더 부자'의 사업 본부장,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Company F의 CCO(Chief Creative Officer)을 거쳐서 현재는 온라인 셀렉트 숍 29CM부사장에서 미디어 콘텐츠 신규 사업 등 창조적 부분을 책입니다 하고 있다.


    요즘은 당연시하게 여기는 '인터넷'과 '웹'이란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던 하나 990년대 놀 만큼 놀면서 본 재능이 풍부한 남자 아이는 뉴욕에서 어학 연수를 토쟈싱'그래픽 디자인'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매킨토시에서 소음악 작업을 하던 프렌드의 모습을 동경하며, 한때 MTV 디자이너를 꿈꾸며 소음악과 디자인을 나쁘지 않았던 김세일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장르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간신히 혜성처럼 등장해 눈길을 끈다. 청와대 홈페이지, 한국의 모든 통신 회사의 홈페이지는 물론 국내 패션 브랜드 홈페이지를 디자인하고 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소움발을 디자인했으며 장르를 넘어 디자이너가 된다. 짧은 쟈싱 마나 그의 20대를 소개했지만 치에궁콧 그가 작업한 포트폴리오를 자신 욜하면'아! 이것' 하고 무릎을 탁!치게 되어 하나 편에서 5개를 채울수록 양이 어마어마하다. 누가 봐도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였지만 자신은 디자이너계의 아웃사이더라고 담담하게 말문을 연다. 20하나 8년의 마지막 Oh! 크리에이터의 주인공은 디자이너 김세일이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1편의 드라마 같은 뉴욕 유학생 시절에 타임 슬립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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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에서 광고&그래픽을 전공했어요. 아내 썰매에게는 디자인 유학이 아닌 어학연수를 떠났다고 들었다.나는 학력 테스트 세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대에 진학했지만 상상했던 커리큘럼과 당신들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하여 OT, 신입생환영회만 참석하고 즉석자퇴했습니다. 고등학교때부터 많이 놀던 아이여서, 보통의 놀이문화에는 우울해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가 끝! 그만 놀자는 분위기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공부가 하고 싶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부터 갈 생각에 지원했지만 1년 반을 기다려야 했어요. 하나 990년대는 너무 사람이 많이 태어난 시대와 자원해도 즉석 입대하지 못 했다. 기다리는 동안 뭐든 배울까 하는 생각에 가장 쉽게 떠오른 게 언어로 영어학원을 다녀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90년대 뉴욕은 어땠나?진실이 좋았다. 가자마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원래 LA에 가려고 했는데 처가는 유학이에요. 보니까 친척들이 사는 뉴욕을 골랐어요. 삼촌에게 "요기에 있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더니 학교를 권유해서 당시부터 디자인 학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막연했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디자인을 좋아했어요.디자인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니?나는 싫증을 잘 내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사물을 찾아내면 그림을 그려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한글도 간판으로 외운 사람이에요. 거의 매일 어디에 탈 수 있는지 관심이 많다. 그리고 사이니지와 연장선상에 있는 택시, 현수막, 자동차 번호판 등 대중의 눈으로 보는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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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일이 선택한 학교는 뉴욕 비주얼 아츠 스쿨(School of Visual ArtsNY)이었다.이 때 알아봤다 학교가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 S.V.A의 3곳이었다. TOEFL점수는 조금 부족했지만 인터뷰가 잘 되고 운 좋은 3곳과도 받아들여졌다. 당시는 그 학교의 정학생이 아니더라도 각 학교에 1반씩 수강할 수"컨티뉴 당사자 에듀케이션(Continuing Education)"라는 제도가 있고 1학기씩 같는 것이 생겼지만, S.V.A가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F.I.T, 파슨스는 경력을 쌓기 위한 인재양성소였다면 제 기준으로 S.V.A는 더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강했어요. 나는 그걸 좋아했어.S.V.A의 커리큘럼은 감정에 들은 자신감? 뉴욕의 학교 생활은 어때서 신?일, 2학년 때는 드로잉 이쟈싱 페인팅, 종이를 찢어 붙이는 배우는 디자인 과정이 필수이며, 3,4학년 때는 컴퓨터 작업을 시작하는 시대에 공부를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을 보냈고 내가 괜찮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졸업할 때는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렇게 5년 반이 흐르는 대한민국으로 돌아갔다. 군대를 가야 하니까. --정 스토리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S.V.A의 장점 중 하자신가 교수진이 현업에 재직 중인 실무자라는 것이다. 교수 중 한 명이 MTV 아트 디렉터였는데 스카우트제 계획을 받았다. MTV에 꼭 취직하고 싶어 취업도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였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도 좋다는 스토리 때문에 일단 군대부터 가자는 의견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병무청에서 잠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세일 씨, 미쿡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오셨다면서요?병무청 좀 오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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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것과 군대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먼저 내가 어떤 공부를 해왔는지 물었다. 당시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예기 자체가 몰랐고 한국 행정부처 sound에서 웹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였다. 그래픽 디자인을 뭐라고 설명해야 병무청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지 감정하고, "인터넷 알죠?" "네, 알죠?" "그럼 웹도 아시죠?" "네, 알아요" "제가 그걸 디자인하는 공부를 해 왔어요"라고 하자 "이건 모두 김세일 씨 같은 사람을 찾는 회사인데 여기서 근무하면 군대를 대신할 수 있어요"라고 제게 두꺼운 책을 건넸다.신기하다. 한편의 <응답하라1997>얘기를 듣는 듯했다 우리 정부가 병역 특례 제도가 도입된 시기이며, 내가 디쟈이쟈네로는 첫번째의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졸업 후에는 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출발이었을 것이다. 군대였던 직장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가?청와대, 안전 기획부(첫째, 최근 국가 정보원)노동청, 특허청 웹 사이트에서 나의 행정부에 휴대 전화가 아내 sound 나왔을 때 011,016,017,018통신사의 웹 사이트를 다 만들었다. 당시가 1997년 중 행정부가 IMF를 겪으며 터무니 없는 사람들이 힘들어 한 시기에 나는 잘리지 않은 직장에서 2년 반 동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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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들은 군대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신선하다. 제대후에는 다시 America로 돌아갔어?뉴욕행을 소견하고 전역 준비를 하던 중 어느 날 인디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 공윤형(현 sound 악페스티벌 잔다리페스타 대표)으로부터 컴필레이션 sound반의 디자인 작업을 맡기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3호선 버터플라이, 마이 앤트 메리, 허클베리 핀 등이 참여한 앨범이었으나 이때 한글이 아니라 영문으로 국적 불문한 sound클래스를 작성한다. 그 음반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한국에서의 경력이 시작된 것이다. 다양한 가수를 소개 받고 sound반을 작업하는 전역과 동시에 장명진, 팬·위 곤 진· 쓴 장의 3명의 친구들과 함께 광고 대행사"하프도큐멩타(HAP Documenta)"을 만들었다.모든 선택에 있어 망설일 필요는 없다. 새로운 처음에 대한 걱정도 별로 없는 성격인 것 같다.하고 싶은 건 뭐든지 좋으니까. 대신 결과는 책을 모두 가져야 한다.이것이 부모의 가르침이다. 이른바 중고교 때도 부모는 담배? 오케이, 외박도 오케이, 공부? 안 해도 돼. 하지만 네가 결정한 것은 결과가 좋아지든 간에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춘기 때 불만에 못 이겨 자신 없이 자랐다. 놀 만큼 놀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봤으니까. 그리고 성격이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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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들으면 늘 선진기술과 문화에 최전선에 있었다는 소견이 느껴진다. 타이밍도 항상 똑같고. 회사를 차렸을 때는 몇 살이었나?마침 30세였다. 패션, 광고, 홍보, 온라인 등 각 필드의 전문의가 모여 소음반 디자인을 비롯해 잡지, 카탈로그 등 패션 광고를 했다. 신세계인터내셔널에서 밥(V.O.V)이라는 브랜드가 처소음에 자신이 생겼을 때 한섬의 '타'입니다. 옴므(TIME HOMME), 스포츠리플레이(SPORTS REPLAY), 닉스 등 패션 브랜드가 자신만만하던 시절 이들의 온오프라인 광고를 모두 소화했다. 정염소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지금 소견을 보면 선진적으로 아주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일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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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먼저 부른 작업 가수의 음반은? 윤 씨.소리방에서 디자인한 것 중에 기억에 남는 작업을 소개하자면? 왁스커버는 내가 다 작업했다. 전체 기억본은 아니지만 박정현, 엄정화, 롤러코스터, 유승준, 윤상, 순두, 박효신, 박화요비, 양동근, 팀, 김현정, 김원중 등 당시 유명 가수들의 음반 커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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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 만큼 sound락을 괜찮았기 때문에 작업하는 내내 즐거웠던 것 같다. 김세하나만의 디자인 철학은 무엇이었을까.디자인은 시각적 비결이었고 그것이 갖는 본질을 대변하는 역할이었다. sound반은 노래가 메인이었다.sound편보다 디자인이 더 화려하기 때문에 본인의 CD만 돋보이기는 싫었다. 나에게 화려한 디자인과 패키지를 의뢰하면 본인보다 그것을 더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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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일표소리방디자인의특징은뭐라고했죠?규칙이있는것을나쁘지않습니다. 룰 안에서 보이는 게 좋아. 본인은 아직까지 제가 하는 행위 중에서 소리반의 작업을 가장 나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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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부터 쉬지 않고 글만 했어요. 회사를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니?1은 좋지만 비즈니스는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어린 만약 계속해서 1를 만드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이 시대가 끝과 인고 독립하고'로맨틱 Rawmantic'라는 회사를 설립 전에 말했다 1의 연장선에서 서울의 밴과 패션의 웹 사이트,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고갈했다는 소견이 들어 5년 세운 사업을 1프로파일 포기했다.그 무렵은 상당히 대담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인풋은 없고 아웃풋만 계속하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디자인만 잘 하고 창의력이 좋은 회사를 운영하는데 결격 사유가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에은챠냐는 1을 크게 키우기 위해서 더 큰 1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1 하는지 배우고 싶었다. 디자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대학이 경영, 관리,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이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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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행동은 잡지사였다. 평소 잡지에도 관심이 많았죠? 지인의 추천으로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를 만나, 당시 나는 디자인하우스가 어떤 회사인지 월간 <디자인>이라는 잡지도 몰랐을 때였다. 물론 잡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내가 이영혜 대표의 화술에 넘어갔다.(웃음) 사람들을 설득해서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 배울 게 있다고 판단했죠. 디자인하우스 디자인본부에 투입돼 월간 디자인을 리뉴얼하고 단행본 커버, 디자인하우스에 있는 각종 로고, 종이로 만든 미술관 페이퍼 뮤지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하나가 됐습니다.소음반, 웹, 마캐팅 디자인뿐이었던 김세하나에게 새롭게 하나를 배우는 계기가 된 것 같다.가장 최근에 보니 디자인하우스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사건이 있는 곳에 투입돼 사건을 해결하는 소방관 같았다. 이를 계기로 디자이너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알게 됐고, 여러 분야의 하나를 배우면서 가끔 시간을 보낸 것 같다.디자이너로서 정말 얘기를 많이 해왔는데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소개하는 이유가 또 있는가?디자이너로 오래 활동했지만 자신은 디자이너보다 오히려 다른 필드에 있는 사람들과 더 친하다. 물론 디자이너와의 대화는 잘 통하지만 내가 소견하지 못하는 것과 내가 흥미가 있어서 하지 않은 데서 생기는 의외성은 디자인 인더스트리에선 이상형을 자신할 수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로서 어느 그룹에 속해 있는 것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 기획| 디자인 프레스 편집 부글| 디자인 프레스 객원 에디터인 김 사진| 킴쟈은도우이(516 Studio)


    디자인 프레스는 매주 한명의 크리에이터를 선정하고'네이버 디자인 – Oh! 크리에이터'를 연재합니다. 동시대를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 당신과 아티스트에게 듣는 다양한 E스토리! 네이버 디자인판에서 매일 시청하세요. :-DOh!크리에이터 – 디 쟈이당싱킴세일 ▶ 1. 나는 아웃사이더 디쟈이당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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